들어가기 앞서 분명히 하는 사실 하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다만 근래 들어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의미의 상당부분이 변했다고 느껴 좀 더 자세히 기술한다면,
1. 나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남성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사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성평등이 도래한 선진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도상의 얘기일 뿐이며 젠더간의 권력차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회는 남성이 의사가 되고, 여성이 간호사가 되어 의사인 남성을 보조하는 그림에 더 익숙하며 그것을 선호한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제도상의 자유가 확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분위기와 성역할에 대한 기대는 통계적인 언밸런스를 초래하도록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의사가 간호사보다 더 '권력적'이므로, 이 사회는 곧 남성이 여성보다 더 권력적인 사회이며, 젠더간의 권력차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한 이같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객체화', 또는 '대상화' 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얘기해온 대로 미소지니를 타파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사회는 특정한 개인의 외모나 섹스어빌리티를 볼 때 남성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여성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더 높다. 화장이나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패션 따위는 선택의 문제이기 앞서 사회의 요구이기도 하다. 단순히 귀찮으면 화장 안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개인의 선택 문제로 치부해버리면서 성평등을 주장할 수 없는 지점이다.
또한 이러한 권력 격차와 객체화는 결과적으로 여성의 도구화를 낳는다. 여성을 가축 취급하며 성노예로 부리고 착취하는,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보다는 훨씬 마일드하고 사이즈가 작지만, 동일한 성질의 문제가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근절되지 않는 성매매는 단순히 여성의 자발적인 돈벌이에 대한 의지보다는, 여성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이용 가능한 성욕 처리 도구라고 인식하는 사회 내의 정신에 뿌리를 둔다. 또한 신입 간호사들에게 야한 춤을 추도록 강요하는 병원은, (그 강요의 주체가 여성인 간호사 상사라고 하더라도) 야한 춤의 섹스어필적 요소를 즐기는 권력적이고 주체적인 남성을 상정하므로 여성을 유희거리로 전락시킨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한 도구로 취급되고 착취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페미니즘이 앞으로도 갈 길이 멀고, 성평등이 도래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일어나는 페미니즘의 여러 운동들이 상당히 못마땅하고 우려스럽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의 PC 운동이 그렇듯, 사회에 존재하는 실제 약자를 돕는 것보다는 사회 내에서 그들의 주장의 도덕적 헤게모니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약자는 평등과 복지를 실현할 목표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의 논리를 완성시킴으로써 이슈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끔 하는 도구로 소비된다.
이번 유아인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유아인에 대해 "냉장고 문 열다 애호박 하나 있는 걸 보면 혼자란 무엇일까 고민하며 코찡긋할 것 같다."라고 쓴 멘션은 유아인에 대한 농담이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니(코찡긋)" 이라고 유아인이 쓴 것 역시 그에 대한 농담이었다. 유아인의 이 멘션에는 그 어떠한 젠더적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극단적으로 예민한 이들이 유아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그 잣대에는 여성혐오나 데이트 폭력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이 멘션을 젠더 문제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유아인이라는 인간을 여성 혐오자,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소비하여 피해자(유아인 본인과, 유아인에게 폭력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인물)를 발생시켰다. 즉, "데이트 폭력을 몰아내야 한다."라는 그들의 도덕적 주장이 사회 내에서 지속적인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아인과 실제 존재하는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을 소비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처럼 사회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또는 발생할 피해자와 약자를 위해 운동하기보다는, 그들의 주장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위해서 운동한다.
진짜 말고는 함께할 친구가 잘 없는것같고 그대로인데
둘째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운동 과정에서 다른 약자들에 대해서 너무나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나는 인권 운동이라는 것의 핵심은 단순히 자신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권 운동이란,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받는 억압과 같은 맥락에서 관찰하며,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측면에서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억압에 대해 문제 의식을 느끼고 노동자의 인권 운동을 벌이는 이는 다른 약자들, 성소수자나, 아동,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동일한 문제 의식을 느끼며 정신적으로나마 연대한다. 왜냐하면 결국 억압의 착취적이고 가학적인 구조와 평등에 대한 갈망은 어떤 계급간의 갈등에서든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약자들의 억압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하다.
이번 호주 아동 성범죄 사건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워마드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 대결이라는 구도에 집착한 나머지 아동이 성인에게 받는 억압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했다. 그들에게는 성범죄를 당한 남아의 사진은 함께 고통을 느끼고 분노할 이슈가 아니라 '여아에 대한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를 비판할 무기로 취급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미러링이라는 명목 아래 피해자의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하며 웃을 수 있고,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된 피의자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을 모금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발언으로 하리수와 논쟁을 벌였던 한서희 역시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연유로 철학자 강신주 역시 '페미니즘은 수준 떨어진다.'고 비판한 적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강신주의 지적에 대해 발끈했으나, 사실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페미니즘 운동의 현주소에 대해 반성해보아야 할 때다. "페미니즘엔 인문주의적 통찰이 없다."는 강신주의 지적은 유효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실제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른 억압들에 대해 무감각하고, 급기야는 비슷한 억압을 받는 '게이'라는 성소수자 계급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적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오능 ㅋㅋ 하고 물품배송에 관한 얘기는 아예 안하네요.
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때, 페미니스트들은 진정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서 운동한다기보다는 기존 우리 사회에 존재하던 남근주의에서 파생된 기형적인 권력 집단으로 판단된다. 페미니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휘두르는 이들이 작가, 교수, 평론가, 언론인 등 많이 배운 중산층 이상의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자. 그들은 수많은 계급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강자에 속하는 편이므로, 거의 유일하게 약자로 분류되는 여성이라는 계급이 부담스럽고 불편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남성이라는 강력한 권력을 시기하며, 그와 같은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는 남성이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여성이 남성의 권력을 빼앗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그들이 남성의 언어나 행위를 모방한 후 스스로에게 쿨하고 당당한, 진취적인 여성상을 부여하면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되새김질하는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곽정은이 장기하를 바로 앞에 두고 "이 남자 침대에선 어떨까."라는 성희롱적 발언을 던지는 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객체화되고 도구화될 때 느꼈던 젠더간의 권력차를 언어로 전복시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남성의 권력을 누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오는 있던 전부를 내가 무는 것은 부당하다 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된다네요...
즉,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것은 여성 해방이나, 성평등이라기보다는, 남성이 누리고 있던 제1의 성이라는 권력 그 자체에 가까워 보인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일반은 그들의 논리와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로 취급될 뿐인 것이다.
궁금한Y에 나왔던 연속 신공 다시 준다면 믿겠냐?